서비스직만 10년, 새 직장을 구해야 하는 무직 상태가 되었다.
내세울 만한 전문성이라곤 고객 관리 노하우 정도가 전부였지만, ADHD답게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일만큼은 차고 넘쳤다. 진득하지 못한 밀레니얼인 나는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무역영어 4주 완성’이라는 문구에 홀린 듯 덜컥 수험서를 구입했다. 무역에 관심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삶의 활력을 줄 작고 굵은 성취감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시험은 5월. 마침 한 달 정도 남았으니 4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시험을 준비하면 어디에 좋냐고 물어봤다. 하지만 내 솔직한 대답은 ‘순전히 내 성취감을 위해서’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애초에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이 자격증을 따서 무역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같은 불타는 파이팅도 없었고, 이력서 한 구석에 무역영어 1급 한 줄 적는다고 경력도 없는 내가 어필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저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었다. 오직 뚜렷한 목적의식으로만 움직이는 삶은 나와 거리가 멀었으니까.
책이 배송된 날은 2026년 4월 1일. 매월 1일은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 딱 좋은 날이기에 기대 섞인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기억나는 거라곤 대학 시절 수강했던 국제무역론의 'FOB(본선인도조건)' 딱 하나뿐. 하지만 그건 이 두꺼운 책의 고작 한 페이지 분량이었고, 대학을 졸업한 지도 이미 한참 전이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생소한 용어들에 독학은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해커스 온라인 강의를 찾았는데, 8만 원 이하로 생각보다 저렴해 바로 수강을 신청했다. 이론만 총 55강.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분량이었다. 큰 욕심은 내려놓기로 했다. 합격보다는 일단 '완강'을 목표로 시작해 본다.
자, 책상에 앉았다. 그렇다고 곧장 공부할 마음이 들 리가 없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스크롤을 내리고, 오늘 저녁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신다. 정신을 차려보면 벌써 2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오늘도 계획표대로 진도를 빼기는 글렀다. 하루 할 일을 작은 메모지에 적어두곤 했지만 나도 잘 안다. 내가 늘 무리하게 계획을 잡는다는 것을. 그렇게 해야 그나마 반이라도 해내기 때문이다. 공부 시간 트래커 앱을 켜고 스마트폰을 시야에서 완전히 치워버렸다. 그렇게 측정해 보니 내 진짜 집중력 시간은 겨우 30분에서 50분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보다 짧으면 그건 그냥 공부가 하기 싫은 상태인 거다.
집중력이 흐려질 때쯤 인강을 멈추고 잠깐 숨을 고른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건 온라인 강의의 가장 큰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다. 강의를 멈춘 뒤 입이 심심해져 코코넛 향이 나는 홍차를 한 잔 우려온다. '이 한 잔을 다 마실 때까지만이라도 꾹 참고 수업을 듣자'며 스스로와 타협을 시도한다.
4월의 창밖에는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꽃은 이리 살랑, 내 마음은 저리 살랑. 결국 책을 덮고 꽃구경을 다녀왔다. 목표를 쫓아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생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봄은 내년에도 오겠지만,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내년 봄에도 온전히 내 곁에 있어 줄지는 알 수 없다. 좋은 날씨에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내 인생에선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5월 초 시험을 목표로 '2~3주 이론, 1주 기출'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양이 너무 방대했고 모르는 무역 용어가 몇 페이지씩 쏟아져 단어장을 만들다가 결국 포기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어떤 내용이 시험에 나올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이런 식이라면 석 달도 부족할 것 같았다. 영어 역시 딱딱한 법률 용어 위주라 도무지 술술 읽히지 않았다.
결국 이론 강의를 다 듣는 데만 꼬박 30일이 걸렸다. 단 하루도 계획했던 공부량을 채우지 못했다. 원래 28일짜리였던 계획은 어느새 40일로 늘어났다. 출근을 안 하니 시간은 많았지만, 현대인의 고질병인 '주의집중력장애(ADHD)'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집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회사 다닐 땐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방구석의 잔짐들이 제발 자기 좀 치워달라며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시험 기간만 되면 갑자기 방 청소가 하고 싶어지는 건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계절이 바뀔 때 대청소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은 엄연히 공부하겠다고 선언한 기간이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청소할 목록들을 포스트잇에 따로 적어둔 채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4월 말, 신용장 파트의 강의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모르는 것만 늘어갔다. 결국 5월 첫 주에 예약해 둔 시험을 둘째 주로 미뤘다. 가벼운 재미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덜컥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냥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시험 일정도 다 다듬어놓았으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기출문제로 넘어갔다. 어차피 자격증 시험일 뿐이다. 학문을 탐구하려는 게 아니니, 딱 합격 점수만 맞추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기출문제를 풀어보니 또 한 번 좌절이 찾아왔다. 아는 건 없는데 신기하게 점수는 합격 커트라인 언저리가 나왔다. 해설 강의를 듣고 다음 회차를 풀어봐도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점수는 꾸낙꾸낙 합격선에 걸쳤다. 특히 영작문 문법을 찾는 문제에서 오답이 쏟아졌다.
이쯤 되니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다. '조금 덜 공부해도 대충 합격할 것 같은데?' 하는 안일한 마음과, 동시에 밀려오는 극심한 불안감. 공부도 운동처럼 웜업이 필요해서 책상에 앉은 첫 30분간은 무얼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잠들기 전, 다음 날 읽어야 할 페이지를 미리 펼쳐두고 모니터 옆에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 일단 읽어! ]
무얼 할까 고민하며 스마트폰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한두 시간은 우습게 흘러가 버린다. 좋든 싫든 일단 시작하면 뭐라도 남는 법이다. 그 삼십 분이 모여 한 시간이 되고, 그것들이 쌓여 비로소 공부가 되는 것이니까.

5월 10일, 화창한 날씨였다. 어차피 떨어지면 붙을 때까지 볼 생각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상공회의소 시험장으로 향했다. 막상 겪어본 CBT(컴퓨터 기반 시험) 시험의 단점은 지면처럼 문제에 밑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치며 문제를 풀 수 없다는 점이었다. 종이책으로만 공부하다 보니 모니터 화면 속 영어 지문이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우스 왼쪽, 오른쪽 버튼을 번갈아 클릭해가며 예비 마킹으로 확실한 오답들을 쳐내고, 남은 선지 중에서 감으로 찍어 내려갔다. 75문제 중 확신을 가지고 푼 문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기출을 헛 풀었나, 아니면 운이 나쁜 걸까. 어쩌면 모르는 문제들만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아는 것 같은 문제만큼은 절대 틀리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붙잡았다. 신기하게도 스멀스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했다. 75문제에 90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짧은 문제들을 빠르게 치고 나간 덕에 시간은 준수하게 남았다.
화면 속 '시험지 제출' 버튼을 누르고 마침내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바깥 날씨는 눈부시게 좋았다. 지난 40일간 이어온 마일드한 금주,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의자를 뒤로한 채 소소한 행복을 찾아 쇼핑 거리로 향했다. 날씨가 제법 덥길래, 나에게 주는 선물로 시원한 반바지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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